PSI 칼럼

행복 편지 아홉: 가을, 카잘스를 듣다

2014-05-16 | 118

 

제 방 출입문에 붙어있는 인물 사진 포스터입니다.




 

1954년, 파시즘 정권에 항거해 프랑스로 망명한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년)를

저명한 사진작가 카쉬(Yousuf Carsh)가 그의 영혼까지 포착해낸 인물사진입니다.

망명지 쁘라드의 한 성당에서 작은 창을 향해 등진 모습으로 첼로를 켜고 있는 구도자 같은

카잘스의 뒷모습에서 외로움과 경건함이 동시에 느껴지기도 하고

그의 첼로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일에 평생에 걸쳐 몰입하고 죽는 순간까지 완벽을 향해 정진한 첼로의 성자(聖子),

파블로 카잘스 이야기입니다.

 

 

 

 
<카잘스, 첼로를 만나다>
 
1876년 스페인 카탈로니아의 시골에서 태어난 카잘스는 교회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 덕분으로
4살 때부터 오르간, 피아노, 바이올린을 익혔습니다.
10살 때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간 카잘스는 처음으로 첼로를 만나게 됩니다.
 
「내가 처음 첼로 소리를 들은 것은 호세 가르시아의 연주였습니다.
첫 악장 첫 음이 나오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부드럽고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인간적이었습니다. 연주회가 끝나자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
아빠, 저 악기야말로 제가 연주하고 싶은 악기에요.’ 그 때부터 평생동안 나는 첼로와 함께 살았습니다」
 
곧바로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호세 가르시아로부터 첼로를 배우면서
동시에 연주하기 쉬우면서도 더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자신만의 특별한 운지법을 만들어내면서
금방 스승을 능가하는 연주 실력으로 첼로를 화려하고 진지한 솔로악기로 격상시키는 기초를 다집니다.
 
 
 
 
<카잘스, 바하를 발견하다>
 
「내 나이 열세 살 때 아버지는 나에게 처음으로 풀 사이즈 첼로를 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둣가의 오래된 악보 상점에 들렀는데 많은 악보들을 훑어보던 중
불현듯 낡고 색바랜 어떤 악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 그것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습니다.
그런 모음곡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마치 왕관에 달린 보석들처럼
그 악보들을 품에 안고 돌아와 방에 틀어박힌 체 그 음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 후 80년 동안 그것을 처음 대했을 때의 놀라움은 늘 생생하게 마음속에 남아있게 됩니다.
12년 동안 매일매일 그 곡을 연구하고 연습했지만 그 중 한 곡이라도 무대에 올릴 용기가 나지 않았지요.
스물다섯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중 한 곡을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악보>
 

200년 동안 잠들어있던 바흐의 걸작 ‘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카잘스의 손에 의해
첼로의 성서가 되었으며  카잘스를 첼로의 마에스트로가 되게 해줍니다.
첼로가 지니고 있는 깊은 표현력을 최대한 활용한 바로크 음악의 정수인
이 모음곡은 선율과 반주를 동시에 연주해야 하는 어려움에다가
연주에 필요한 어떤 설명도 없이 오로지 제목과 음표만 그려진 악보를
세련된 철학적인 음악으로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이 곡이 발굴된 지 47년, 공개로 첫 곡이 연주된 지 35년이 지난 1936년,
그의 나이 6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녹음을 했습니다.
‘완벽을 기하다’ 라는 표현이 딱 맞습니다.
 
그럼 시대를 초월한 외롭고 경건한 카잘스의 첼로에 귀를 기울여 보실까요.
1936년에 최초로 녹음된 1번 6곡입니다.
순서는 프렐류드, 알르망드, 꾸랑뜨, 사라방드, 미뉴에트, 지그입니다.
 


 
<카잘스, 위대한 인간>
 
왕실장학금으로 마드리드 음악원에 입학하여 작곡과 실내악을 공부한 뒤
파리로 건너간 카잘스는 드가, 베르그송, 라벨, 생상 등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여
자신의 경력, 인생의 의미에 대해 깊은 성찰의 시기를 보냅니다.
또한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도(Alfred Cortot), 바이올리스트 자크 티보(Jacques Thibaud)와 함께
트리오를 결성하여 30년 동안 전설적인 음악활동을 하게 됩니다.
1919년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고향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사재를 털어
‘바르셀로나 카잘스 관현악단’을 창설하고 운영비는 자신의 첼로 연주 개런티로 메꾸면서
쇤베르크, 프로코피에프, 클렘페레 등 세계적인 작곡가와 지휘자를 초빙하여
관현악단의 성장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1936년 7월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대가 바르셀로나를 침공한 날,
위급한 상황임에도 피하지 않고 예정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눈물섞인 지휘로  청중들에게 끝까지 들려주고,
조국에 평화가 찾아오면 다시 모여 이 곡을 연주하자고 단원들과 약속하고는
남 프랑스 쁘라드로 망명을 떠납니다.
이들에게 베토벤 9번을 연주할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지요.
 
 
 
<카잘스, 사람을 끌다>
 
스페인 내전이 결국 프랑코 독재정권의 승리로 끝나자, 카잘스는 망명지 쁘라드에서 프랑코를 피해
망명해오는 동족난민을 돕기 위해 온갖 힘을 기울이는 한편 프랑코에 항거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고자
‘프랑코가 스페인을 통치하는 한 절대로 첼로연주를 하지 않을 것이며
프랑코 정권을 지지한 나라는 결코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외에 천명하게 됩니다.
그 후 10년동안 그 누구도 카잘스의 첼로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은둔 생활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의 연주를 갈망하던 세상의 위대한 음악가들이
‘당신이 나오지 않겠다면 우리 모두가 거기로 가겠소’라고 말하면서
카잘스가 가장 좋아하는 바흐의 서거 200주년 기념 음악제를 쁘라드에서 개최하게 됩니다.
인구 5,400명의 작은 마을에 크라이슬러, 아이작 스턴, 시게티, 제르킨 등
당대의 최고 연주가들이 오로지 카잘스를 위해 모여들고 마침내 카잘스는 무대에 오릅니다.




                               <쁘라드 음악 축제에서 연주하는 카잘스>

 
이렇게 탄생한 쁘라드 음악축제에서는 1956년 젊은 아내의 고향인 푸에토리코에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하고
이주를 한 후에도 10년동안 카잘스의 첼로를 들을 수 있는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카잘스, 음악의 聖子가 되다>
 
푸에토리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수도 산 후안에서 카잘스 음악제가 개최되고
카잘스는 지휘, 연주, 녹음 등의 바쁜 스케줄 중에서도 인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알리기 위해
UN총회, 백악관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죽기 전날까지도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습한 카잘스가 향년96세로 임종을 하는 날,
마지막으로 들었던 음악 역시 피아니스트 유진 이스토민이 연주한 바흐였습니다.
제자 중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마에스트로, 나이가 95세인데 아직도 하루에 6시간씩 연습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카잘스가 대답합니다.
 
‘지금도 연습을 할 때마다 연주 실력이 향상되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카잘스 동상. Monserrat>

 
한 평생 첼로에 몰입하고 완벽한 연주를 생의 마지막 날까지 진지하게 추구한 구도자,
예술가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행동으로 보여준 훌륭한 인격과 양심의 소리에 늘 깨어있는 경건함이
고스란히 베어 있는 그의 연주는 삶에 지친 우리에게 더 잘 견뎌내라는 신의 선물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카잘스가 작곡한  <새의 노래> 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카잘스가 연주회의 맨 마지막에 들려주는 자작곡입니다.
특별히 카잘스의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카탈로니아 민요를 첼로에 맞도록 편곡했는데
독재에 탄압받는 스페인의 비극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청중들에게 호소하는 의미였답니다. 
당시 이 곡을 들은 많은 청중들이 가슴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그냥 눈물이 몸 어딘가에 고이거나 한 방울쯤 ‘톡’ 떨어진다면
이 음악 역시 신이 카잘스를 통해 우리에게 보낸 치유의 선물일 것입니다.
초가을, 휴일 아침 카잘스를 꼭 들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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