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I 칼럼

감성편지 셋: 씩씩한 사람, 씩씩한 노래, 씩씩한 그림

2014-05-16 | 102

 

늘 씩씩하신 L님에게

또 다시 앞 산의 나뭇잎들이 연두와 노랑과 초록의 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팔레트에 온갖 녹색 물감들과 약간의 노랑, 하얀 물감을 짜놓고 이제 붓으로 쓱쓱 그리기만 하면 봄이 금방 오겠지요.

얼마 전 L님에게 ‘힘들수록 우리 씩씩하게 살아야지요’라고 말하고 나서

‘씩씩하다’란 어휘를 사전에서 찾아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씩씩하다: 행동 등이 굳세고 위엄이 있다.

 

그렇군요. 굳셈 위에 위엄이 더해져야만 씩씩한 거였군요.

우리를 설레게 하는 봄날은 점점 짧아지고 무더위, 먹구름, 천둥번개, 소나기, 장마, 가뭄, 홍수로 이어지는

여름이 길어질수록 우리에겐 씩씩함이 더 절실하게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이 달 오디세이는 ‘씩씩한 사람. 씩씩한 음악, 씩씩한 그림’ 이야기 입니다.






‘씩씩한 사람’을 저의 뇌에 입력하자마자 제일 먼저 튀어나온 이 사람의 이름은 김민기입니다.

43살 때 발매한 김민기 4집의 표지 얼굴인데 분명 굳세고 위엄이 있습니다.

6.25 전쟁의 와중인 1951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김민기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조산원이셨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직전에 퇴각하던 인민군의 무차별 학살에 아버지가 희생되는 바람에

김민기는 유복자로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어머니는 함경도 원산에서 태어나 연희전문을 다녔던 신식여성이었지만

4학년 때 기숙사내의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에 항의하다가 제적을 당합니다.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 자격증을 따고

귀국해서는 남도의 여러 곳을 다니며 진료활동을 하다가 익산에서 김민기의 아버지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10남매를 낳아서 씩씩하게 키웁니다. 아버지 몫까지 대신하여...

김민기는 이런 씩씩한 엄마의 막내로 태어난 거지요.

어린 민기는 서 너 살 때부터 어머니, 형 다섯, 누나 넷이 직장과 학교로 떠나면

늘 혼자 남아 집을 지켜야 했습니다.

텅 빈 적막한 집에서 하루 종일 지내야 하는 그에게 유일한 놀이이자 즐거움은

막대기로 땅바닥에 그림 그리기였다고 그는 추억합니다.

말과 글자를 익히기 훨씬 전부터 그림을 통해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시작한 셈이지요.

그의 감수성의 결정체인 음악에도 이런 조숙한 외로움과 홀로 있는 공포가 밑바닥에 깔려있지 않을까요.

경기 중학교 시절에도 공부는 뒷전이고 미술반과 보이스카웃 활동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를 음악으로 이끈 첫 선생님은 서울음대 피아노 전공이던 셋째 누나입니다.

누나의 피아노 연주를 듣다가 잠들곤 하던 김민기가 경기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이 누나가 클래식 기타를 입학 선물로 사주었습니다.

누나의 피아노 악보로 기타를 익히고 이내 금방 효과내의 소문난 기타리스트가 됩니다.

누나가 사준 기타 한 대가 김민기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습니다.

‘아침이슬’, ‘친구’,’상록수’,’작은 연못’,’금관의 예수’, ‘지하철 1호선’으로. 그리고 씩씩한 사람으로…

 

 

<씩씩한 노래 이야기>
 

김민기의 노래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면서 가장 씩씩한 노래입니다.

곡목은 ‘천리길’입니다. 따라 부르다보면 심장에 ‘씩씩근육’이 몇 개쯤 돋아나는 느낌이 든답니다.

가삿말은 그야말로 하룻동안의 서사시입니다. 꼭 따라 불러보시라고 가사를 전부 적어 보냅니다.

6분 30초짜리 긴 노래이니 호흡은 미리 가다듬으셔야 할거에요.

 

음악: 천리길


천리길
1. 동산에 아침햇살 구름 뚫고 솟아와
새하얀 접시 꽃잎 위에 눈부시게 빛나고
발 아래는 구름바다 천리를 뻗었나
산아래 마을들아 밤새 잘들 잤느냐

 

2. 나뭇잎이 스쳐가네 물방울이 나르네
발목에 엉킨 칡넝쿨 우리 갈 길 막아도
노루 사슴 뛰어간다 머리 위엔 종달새
수풀 저편 논두렁엔 아기 염소가 노닌다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3. 쏟아지는 불햇살 몰아치는 흙먼지
이마에 맺힌 땀방울 눈가에 쓰려도
우물가에 새색시 물동이 이고 오네
호랑나비 나르고 아이들은 촐랑거린다

 

4. 먹구름이 몰려온다 빗방울도 떨어진다
등 뒤로 흘러내린 물이 속옷까지 적셔도
소나기를 피하랴 천둥인들 무서우랴
겁쟁이 강아지는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5. 동산에 무지개 떴다 고운 노을 물들고
하늘가 저 멀리엔 초저녁 별 빛나네
집집마다 흰 연기 자욱하게 덮히니
밥 냄새 구수하고 아이들을 부르는 엄마소리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6. 출렁이는 밤 하늘 구름엔 달 가고
귓가에 시냇물 소리 소골소골 얘기하네
졸지 말고 깨어라 쉬지 말고 흘러라
새 아침이 올 때까지 어두운 이 밤을 지켜라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작사 작곡에 기타를 들려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허밍도 함께하고…

제 귀에는 40대의 어른 김민기가 어린시절의 김민기에게 불러주는 응원가처럼 들립니다.

어때요? L님도 먹구름이 올 때마다 마음의 응원가로 이 노래를 씩씩하게 부르실거죠?

자, 이제 씩씩한 그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씩씩한 그림 이야기>




                <W.Herbert Dunton>


Dunton은 1878년 미국 동부 Maine주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농사일에 바쁘다보니 유소년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아버지를 따라 숲에서 보냅니다.

사냥하고 동물들과 어울리고 숲을 관찰하고 숲에서 먹고 숲에서 자고…

한 마디로 ‘아웃도어 라이프’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 아이에게는 그림 그리는 천부적인 역량이 있어 숲을 나름대로 스케치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유소년기의 삶이 Dunton의 평생 삶으로 이어집니다.

18살 때 처음으로 서부 몬타나로 여행을 떠났는데 광활한 서부의 다양함에 매료되어

이후 15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서부로의 여름여행을 떠납니다.

한 때 보스톤의 정규 미술학교에 입학하지만 금방 그만두고 뉴욕에 가서

탁월한 스케치 능력을 인정받아 상업적인 삽화가로서 명성과 안정된 수입을 얻지만

이마저 자신의 기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만두고 서부의 광활한 야생으로 귀환합니다.

서부로 아예 이사까지 하고 나서부터 Dunton은 오로지 ‘서부’만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모제스 할머니가 ‘그리운 옛날’을 그렸다면 그는 ‘Once upon a time in the west’를 줄기차게 그러낸 셈이지요.

대공황과 맞물려 그의 그림은 누구의 주목도 끌지 못했기에 죽을 때까지 가난한 삶을 살게 됩니다.

씩씩한 사람들은 외로운 삶을 사는걸까요?

아니면 진정 외로움을 아는 사람만이 씩씩해지는 걸까요?

나이 50세 때 발병한 십이지장암이 위, 폐암까지 전이되는 6년의 긴 투병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Dunton은

1936년 쉰 여섯의 나이로 씩씩하고 외로운 삶을 마감하고 서부의 한 줌의 흙이 됩니다.

 




     <The Shower>


소나기가 몰려오는 하늘이 어쩜 이리도 시원할까요
오로지 푸른색만을 사용하여 먹구름과
몰려오는 소나기를 표현했군요
그것도 큰 붓질 한 번으로
점점이 꽃 피어있는 먼 산들은 이미 소나기에 흠뻑 젖어
짙은 푸르름으로 변했는데 씩씩한 두 주인공 남녀는
뒤쫓아오는 소나기를 피하려고 말과 함께 전력으로 질주하여
화면 앞 쪽의 노랑과 연두 빛 봄 햇살 속으로 들어서고 있군요.
남자가 오른편 하얀 옷의 연인에게 말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평생을’서부’만을 그린 씩씩한 사람의 그림답습니다.
너무 씩씩하여 화폭 밖으로 말들이 튀어나올 듯 생동감이 넘칩니다.

 

제가 수수께끼를 하나 낼까요? 그림 속에서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시선을 흙먼지 뒤쪽으로 옮겨보시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잘 모르겠다구요?

저도 열 번쯤 보고 나서야 발견했으니까요. 자, 조금 확대해서 볼까요?




 

 

밤색 말을 탄 푸른 셔츠의 한 남자가 기를 쓰고 달려오고 있지요?

콩알만한 그림을 숨겨놓고 우리에게 찾아보라는 Dunton 아저씨도 참 유쾌하신 분이십니다.

그나저나 더 쳐지면 소나기에 흠뻑 젖을텐데…저토록 힘겹게 외로운 질주를 하는 사람에게

우리 함께 응원해 주어야겠죠.

‘조금만 더 힘내세요. 조금만 더!’

 

 

 

<우리의 씩씩함>
 

외로운 사람만이 씩씩할 수 있고 씩씩한 사람만이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응원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씩씩하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래오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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